이 태 묵

유구사람들은 참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같이 계속되는 폭우에도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풍수해를 크게 겪어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저께 인근지역은 200㎜가 넘도록 비가 내렸지만 유구는 101㎜ 밖에 안 왔으니까요. 그럴 법도 합니다.

십승지는 종교가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지역의 길흉화복을 기록한 비기(秘記) 아닙니까. 십승지(十勝地)란 무엇일까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 ①영주 풍기읍 ②봉화 춘양면 ③보은 속리산면 ④남원 운봉면 ⑤예천 용문면 ⑥유구마곡 ⑦영월읍 ⑧무주 무풍면 ⑨부안 변산면 합천 가야면, 전국에서 뽑은 10곳입니다.

얼른 생각해보면 풍광이 좋은 산속입니다. 모든 십승지가 위치한 지역이 지리산과 서울 이남으로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산이 높고 외부와 교류가 자유롭지 못한 곳을 택하고 있어 풍수해가 적고 난세를 피해 몸을 숨기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삼재불입지지의 확률이 높은 순서대로 되어 있다는 것도 그냥 적당히 넘길 수 없는 요소지만, 6번째 땅인 유구마곡이 십승지의 힘이 작지 않다는 것도 생각해 볼 요소입니다.

정감록에“유마양수지간 주위 백리 가면 살육” (維痲兩水之間 周圍 百里 可免 殺戮)과 “유마양수지간 만인가활지지”(維痲兩水之間 萬人可活之地)이라는 용어가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100리 내에서는 죽음을 면할 수 있고, 누구나 살기 좋은 땅이라는 내용입니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중기에 펴낸 책으로, 누가 쓴 책인지 얼마나 정확하게 들어 맞는지 알 수가 없지만, 그 당시 어렵게 살아가는 민중들에게는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십승지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전 유구는 나그네들의 휴식처 역촌이었습니다. 여든리라는 동네가 말해주듯 온양 80리, 공주 80리, 예산 80리, 청양 80리의 중간에 위치해 있고, 고개 너머에 마곡사가 있어 천연적인 교통의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한양길로 오가는 사람들과 말의 활발한 유구 역으로서 기능을 다하다가, 유구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이후였습니다. 8.15광복과 6.25한국전쟁으로 어려워질 무렵, 이북이나 경상도 등 전국에서 피난 온 분들이 주축이 되어, 이때부터 유구의 중심지가 옛날의 역촌에서 소공업지역으로 변해갑니다.

피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후 그들이 호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직조업 이었으니까요. 1950년도에는 10여 호로 시작한 직조업이 1955년도에는 100여 호로 늘어났고, 1960년도부터는 피난민뿐만 아니라 유구의 원주민들 까지 1000여 호로 늘어나 “3000공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나라 어느 곳에 가나 인조견하면 유구 인조견을 최상품으로 꼽던 시대였다고 합니다. 십승지의 영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십승지의 힘은 오늘날 직조업을 일으켜 세워 우리나라 최대 한복지생산 뿐만 아니라, 유구장터를 십승지 따라온 사람들로 지금도 북적거리게 합니다. 자연히 이북이나 경상도 말씨가 많아지고 지역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이 섞여서 훈훈한 인정미와 풍성한 산골향기도 쏟아냅니다. 읍내에는 높은 교회건물과 산속 사찰들도 눈에 많이 띱니다. 십승지 찾아온 분들에게 삶의 희망과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순한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새로운 유구문화를 만든 원인은 아무래도 십승지의 힘이 아닐까요.

그런데 십승지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유구 청년회의 산실인 조선 민족청년단 유구단부가 정부수립의 격동기 때 사회질서운동에 앞장서면서 전국에서 손꼽히는 청년단체로 부각되었는데, 그 청년들의 힘의 바탕이 된 것은 추정할 수 있지만, 동학란 때 관군과 맞서 싸우던 동학군이 1000여명이 된 점과 일제 강점기에도 만세운동을 하다가 42명이 희생된 점이나 6.25한국전쟁 때에도 30여명이 북한군에게 저항하다가 희생되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북으로 끌려간 점은 십승지로 이야기가 안 됩니다.

전쟁이나 전염병, 흉년에도 죽지 않는 다는 십승지 아닙니까. 십승지에 묻혀있으면 죽음도 면하고 배고픔도 면한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굳이 죽음의 현장으로 나설 이유라도 있었을 까요? 그런 용기와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 까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냥 덮어 놓을 수 없는 요소들 아닌가요?

저는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마다 유구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보듬어 주었고 불의가 판 칠 때마다 정의를 불살랐던 그 힘은 자연을 믿고 운명을 믿고서 용기를 만들어낸 것이 십승지의 힘이라고. 십승지는 결코 종교가 아닙니다. 정감록이 황당한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조정관료주도시대에 민간인이 썼다고 하여 천대받고 작가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생각과 기대만큼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유구사람들 가슴속에는 십승지의 힘이 살아 있습니다. 십승지가 한낮 흘러간 역사가 아닙니다.

설사 이것이 맞지 않는다하더라도 믿음의 미학, 긍정의 힘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긍정적 생각을 가진 자는 긍정의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고, 부정적 생각을 가진 자는 부정적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골 마을 평창이 세계속의 평창이 되고 있는 것처럼, 유마 십승지도 마냥 시골이 아니라는 것을 기대해 봅니다.
/공주시 시민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