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 묵

큰 추위를 물린 4월입니다. 이 계절에도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분들이 농촌에는 꽤 많습니다. 혼자 사시는 독거노인들 말입니다. 유구에도 한마을에 10명 중 3명 정도가 독거노인들이니까요. 대부분 이분들은 금슬 좋게 평생을 의지하며 사시다가 둘 중에 한분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한분만 고아처럼 남으신 것입니다.

우리네 아버지들이 먼저 가시면 좋으련만 어머니들이 먼저 가시면 당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책이야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장 조석을 끓여 드시는 일 부터가 막막합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하루 세끼 입에 저절로 들오던 밥이 없어져 버렸으니, 아버지는 당황하고 막연했습니다. 딸 넷에 아들 하나가 있긴 하지만 저마다 가정이 있고 생활이 있어 도회지로 나가 함께 살 수 없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여든 셋의 늙은 아버지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된장국의 물의 분량은 2인분 이면 두 대접 정도에 된장은 큰 수푼을 하나, 죽은 쌀을 한 시간 정도 담갔다가 쌀 하나에 물3의 비율로 약한 불에 천천히 냄비에다 끓일 것, 화장실 가는 것부터 잠잘 때 문단속, 가스 단속하는 것 까지 하나하나 해야 할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커다란 종이에 써 붙여 놓고 멀리 사는 딸들의 지시를 받아가며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눈물겹도록 분투하는 아버지의 홀로서기 "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입니다만 남의 일이라 넘겨 버릴 수 없는, 코앞에 닥쳐온 고령사회를 사는 우리네의 현실이 아닐까요? 저 역시 그런 형편입니다.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더니 4개월 전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88세의 아버지와 75세의 장인만 남아 처절한 분투를 하고 계시니까요. 아이니컬 하게도 두 분 모두가 살아계실 때 이따금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 "아버지를 먼저 보내드리고 죽어야 하는데 "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일을 다 배우지 못한 아버지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살림살이나 세수, 대소변까지도 자신이 처리하신 깔끔한 어머니, 장모님 이였으니까요. 병이 깊어지니까 체념하신 듯 자신의 건강보다는 가정살림을 더 많이 걱정시고 고민하셨습니다.
불행한일을 겪고 보니 형제자매 사이의 따스함이 서로의 가슴속에 녹아들면서 주말마다 5남매의 주말 당번제가 유일한 대안 이였지만, 허둥지둥 자녀들이 함께 왔다가 돌아 갈 때 아버지 혼자 남아 있다고 하는 냉엄한 현실은 처음부터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농토와 정든 집을 버리고 자녀들 집으로 가서 산다는 것보다는 혼자 밥 짓고 집안 살림한다는 것이 아버지로서는 더 낳은 선택 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연로하신 관계로 노인병원에 계시다가 주말마다 자식들과 함께하시고 계신 아버지지만, 이제 장인어른의 혼자살기는 또 다른 시작입니다. 밥을 짓고 반찬 만들고 부엌청소나 빨래는 그냥 되는 줄로 아셨지, 농사일과 바깥일 밖에 모르시던 장인으로서는 하나하나가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이미 어머니를 통해 겪었지만 장모님의 존재가 얼마나 컸던지 다시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유구읍내 마을회관에 가면 혼자사시는 분들을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게 되더군요. 혼자사시는 분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체념한 듯 말씀이 별로 없으신 것 같지만, 대화 없는 고통이 가장 참기 어려운 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자녀들이 이따금 반찬 해갔고 찾아와도 모두들 아버지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자질구레한 얘기만 하고 얼른 돌아가 버리는 세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고 갔으면 좋겠지만 그건 애비의 희망사항일 뿐, 남는 건 허무자체였습니다. 아버지하고 나누는 얘기는 여자들 끼리 나누는 끈적거리는 생활 얘기보다 재미가 있을 수 없고, 자녀들이 교대로 찾아와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말 상대가 되어 드리고자 해도, 각자의 생활에 쫓겨 그것조차 잘 안되는 상황일 겁니다.

"여보, 더우니까 내복 벗고 이 셔츠입고 가세요."날씨 변화에 따라 인형처럼 말씀하시는 어머니 따라 움직였던 아버지들은 마음을 지탱해주는 상대를 잃고, 칭찬해 주는 사람, 야단치는 존재가 모두 잘 조화가 되어야 훈훈한 가정이 유지된다는 걸 통감하고 계신 듯 합니다.

자식들은 너무 바쁘다 보니 아버지를 생각해 볼 새가 없다 고하지만, 아버지들은 하루 종일 자유시간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가정이 가져다주는 따스함을 크게 맛보고 싶은 심정 아닐까요. 우리 곁에는 지금 독거노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회지 보다 농촌이 더 심각합니다. 그 차이원인은 복지 환경 부족입니다. 책이야기와 현실을 겹쳐서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잊으려 해도 혼자서는 힘들기만 합니다. 자녀들 또한 상처 난 가정을 메우려 해도 늘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사 다 그렇습니다.

혼자 사는 외로움 잔치는 빨리 끝내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엄숙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든 무력감을 떨쳐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새봄입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노인 분들에게도 봄은 활력입니다. 세월을 지키기는 어려워도 행복을 얻기는 쉬운 순간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없는 부엌에 아버지들이 당당하게 설 때 행복은 다시 재생된다고. 저도 지금부터 부엌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부엌은 이제 옛 부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연령이 높아지면서 이제 부엌은 여자만이 요리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온 가족들이 함께 행복을 겨루는 현장이 될 테니까요.
/유구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