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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부자 김갑순 일가 이야기
[기고]-이진호 지적박물관장(충북 제천시)
[1328호] 2020년 09월 10일 (목) 17:28:35 공주신문 webmaster@e-gongju.com


 김갑순          김종석

김갑순(金甲淳, 1872∼1960)은 1872년 5월 22일 공주에서 태어났다. 장남 김종석(金鍾錫)은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냈으며 첫째 사위는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차장을 역임한 윤명선(尹明善)이다. 이들 부자와 사위는사이좋게 친일인명사전에 실렸다.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李圭完),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尹致旿), 이완용(李完用)의 손자인 후작 이병길(李丙吉) 등 세력가들과 사돈을 맺어 당대 최고의 친일 혼맥을 구축했다.

김갑순은 1900년 9월 충청북도관찰부 주사로 관직에 나아가 1901년 8월 중추원의관, 같은 해 11월 내장원 봉세관(封稅官)을 지냈다. 1902년 4월 충청남도관찰부 부여군수를 거쳐 1903년 8월 같은 도 노성군수, 1905년 6월 임천군수, 1906년 7월 공주군수, 1908년 3월 강원도관찰도 김화군수를 역임했다. 1909년 9월부터 충청남도관찰도 사무관으로, 1910년 1월 충청남도관찰도 아산군수로 재직했다.

합병 후 1910년 10월 충청남도 아산군수에 유임돼 재직하다 1911년 3월 사직했다. 이후 공주에서 황무지 개간과 소택지 매립, 수리사업 등을 통해 대지주로 성장했다. 1930년대에 공주·대전지역에 논 1200여 정보, 밭 250여 정보, 기타 1800여 정보 등 3300여 정보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도청 대전 이전설이 나오자 재빨리 대전에 수많은 토지를 매입했다.

이때 공주 주민 중 떼돈을 번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는 땅 투기가 제한도 없었던 때였다. 그는 1년에 1번씩 공주군 지적계 전원에게 향연을 베풀면서 "지적창고에 있는 내 땅문서를 1년간 보관하느라 수고했소"라고 했다(고 이승현 지적계장 증언)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3년 6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충청남도 참사를 지냈다. 1913년 7월 충청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을 맡아 1918년 8월까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다. 1915년 8월 매일신보 충청남도지국장을 맡았다.

같은 해 9월 조선물산공진회 평의원, 10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을 지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천황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4월 공주위생조합 부조합장, 1917년 6월 제국군인후원회 통상회원, 1917년 10월 공주군 공주면 상담역을 맡았다.

1919년 6월 충청남도 참사 서한보(徐漢輔)와 함께 일본인 도장관·도경찰부장·공주군수 등을 초빙해 간친회를 열고 "금반 소요는 인민의 오해이니 앞으로 내선인이 특별히 친밀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9년 10월 공주시가지금융조합 조합장을 맡았다. 1920년 10월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면서 조선인참정권운동을 추진한 국민협회의 충청남도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20년 11월 공주면 면협의회원, 12월 충청남도 도평의회원에 선출됐다.

1921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돼 1930년 6월까지 재임했다. 1921년 11월 대전은천주식회사 전무취체역으로 활동했다. 1924년 4월 관선 충청남도 도평의원에 임명됐고 경성취인소 중매인을 맡았다.

1926년 4월 공주군농회 특별의원, 같은 해 7월 충청남도농회 부회장, 1927년 4월 조선농회 통상의원을 지냈다. 1926년 11월 공주면 면협의회원에 당선됐다. 1927년 9월 충청남도 우성수리조합 조합장, 1927년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 공주지부 상담역, 1928년 조선소방협회 충청남도지부 평의원, 1929년 동민회 평의원을 지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에 위촉됐다. 1929년 11월 공주면 면협의회원, 1930년 4월 민선 충청남도 도평의원에 당선했다. 1930년 11월 충청남도농회 부회장을 연임했다. 1931년 2월 매일신보 충청남도지국 고문에 추대됐다.

1932년 2월 애국기 '조선호'헌납을 위한 충청남도지역 모금운동의 상임위원을 맡았다. 1933년 5월 민선충청남도 도회의원, 1935년 5월 공주읍 읍회의원에 당선했다. 1935년 10월 시정 25주년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사회교화진흥간담회에 참석했다.

1937년 유성온천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했고 1938년 1월 조선유림연합회를 대표해 중국 전선(戰線)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1938년 7월 군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겸 평의원, 국민정신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 8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을 맡았다. 1938년 9월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신문사를 인수해 사장에 취임했다.

1939년 2월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를 발기했고 7월 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각종 유림단체를 통합해 유림의 전쟁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10월 군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국민총력경성부연맹 평의원을 맡았고 11월에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충청남도 위원으로 참여했고 9월 임전대책협력회 채권가두유격대 남대문대에 편성됐다.

같은 해 9월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하고 10월에 이사를 맡았다.해방 후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으나 보석으로 풀려났다. 1960년 8월 16일 사망했다.

충북의 대표적 친일파로 민영은을 들 수 있다. 그는 땅 투기를 하지 않은 대신 교육투자를 했다. 학교를 설립했고 학교 건축 등에는 빠짐없이 많은 기부를 했다. 그러나 김갑순은 땅 투기 전문이고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사립학교 하나에도 기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석(金鍾錫, 1899∼?)은 1899년 5월 7일 태어났다. 공주 출신이다.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충청남도 공주의 갑부 김갑순(金甲淳)의 장남이다. 첫 번째 처는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金閏煥)의 딸 김학필(金學筆)이며 두 번째 처는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딸 이절자(李節子)다.

1922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12월부터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 서기과 서기겸 통역생을 지내다 1926년 9월 판사로 승진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근무했다. 1927년 4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판사로 옮겼으며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0년 10월부터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판사, 1932년 2월부터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판사, 1934년 8월부터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판사를 지냈다. 1937년 9월 훈6등 서보장, 1942년 9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수원지청 판사로 재직하던 1939년 10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안민환(安民煥)에게 징역 2년 6월, 권태로(權泰魯)에게 징역 8월의 판결을 내렸다. 1944년 3월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판사로 부임했다. 해방 후 1948년 11월 서울에서 변호사 등록을 했다.

사위 윤명선(尹明善, 1900∼1946)은 1900년 9월 1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尹致旿)의 차남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갑순(金甲淳)의 큰 사위다.

1929년 3월 도쿄(東京)제국대학 법학부 정치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 토지개량부 수리과 속으로 근무했다. 이후 만주로 이주해 1934년 3월 국무원 총무청 주계처(主計處) 속관에 임명됐다. 1934년 3월 만주국 정부에서 건국공로장과 건국대전기념장(建國大典記念章)을 받았다.

1935년경 만주국 국무원 주계처 사무관 겸 대륙과학원(大陸科學院) 총무과장을 지냈다. 대륙과학원은 1935년 만주국의 과학기술 개발을 위해 설립된 국무원 산하의 종합연구기구다. 농산, 축산, 임산, 화학, 전기 등 17개 분야를 연구했으며 일본인 원장 아래 400여명의 직원이 근무했다.

이 무렵 만주국 럭비축구협회 이사, 신징조선인민회(新京朝鮮人民會) 평의원을 맡고 있었다. 1935년 9월 황제방일기념장, 1937년 5월 훈7위 주국장(柱國章)을 받았다.

1938년 총무처 통계처 이사관(천임관 2등)으로 승진, 1940년 직제개편으로 총무처 통계처 통계과장이 됐다. 1940년 5월 총무처고등문관고시위원회 임시위원, 임시국세조사사무국(臨時國勢調査事務局) 서무과장을 겸직했다.

1940년 1월 협화회 신징(新京) 거주 조선인 분회인 수도계림분회(首都鷄林分會)에서 참여(參與)로 활동했다. 수도계림분회는 이범익·최남선·박석윤 등을 고문으로 두고 신징 국무원에서 재직하고 있는 중견 관료와 조선인 유지들로 구성됐으며 국방헌금 및 위문대(慰問袋) 헌납, 직업보도(職業輔導), 이민안내 등의 사업을 벌였다.

만주국 협화회는 1932년 7월 일본 관동군의 지도와 구상아래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교화·정치적 실천단체를 표방하며 조직됐다. 각지에 분회를 조직해 만주국 지배체제 안으로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항일운동에 대한 내부교란과 파괴공작, 선전, 선무공작을 수행하는 한편 전시동원조직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친일 민중통제조직이었다.

1940년 8월에는 조선에서 추진되고 있는 8년제 의무교육제와 징병제 실시에 호응해 만주국 협화회 수도계림분회가 재만 조선인 교육사업을 위해 설치한 조선인교육후원에서 신징지역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 6일에 계림분회 임원전체회의가 개최돼 계림분회의 진용을 전면적으로 강화할 때 참여에 유임됐다.

또한 10월 30일 수도계림분회 주도로 동만주일대에서 항전하고 있던 항일유격대를 귀순·투항하도록 하고 특별공작을 벌이는 부대들을 후원하기 위해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를 결성하자 간사로 뽑혔다. 고문에는 이범석·최남선·유홍순이 선임됐고 윤상필, 박석윤, 김흥두가 총무를 맡았다.

이날 결성식에서 만주 전지역에 50개소의 지부를 건설하고 11월까지 후원금 10만원을 모금하기로 결정했다. 이날에 통과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규칙'에서 동 회의 목적을 '동남지구특별공작에 대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해 명랑한 도의국가(道義國家)로서 완성에 공헌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공작요령'으로서 △귀순 권고(전단,방송) △일만(日滿)군경에 대한 위문 △귀순자에 대한 보도(輔導) △주민에 대한 안정(安靖)을 내걸었다.

11월, 12월 두 달간 후원 성금 15만 4175원을 모금해 예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 위치한 소노베(園部)부대(간도특설대의 별칭)에 헌납했다. 윤명선도 성금 40원을 냈다. 1940년말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명의로 '김일성(金日省) 등 반국가자에게 권고문, 재만(在滿)동포 150만의 총의'라는 권고문을 다량 제작해 비행기로 살포해 동만주 지구에서 활동하는 항일 유격부대의 투항을 독려했다. 1941년 7월 국세조사기념장(國勢調査記念章)을 받았다.

1942년 2월 전매총국(專賣總局) 이사관으로 전근해 주정과장(酒精科長)을 지냈고 같은 해 9월에는 천임관 1등으로 승서(陞敍)했다. 1944년 12월 젠다오성 민생청장(간임관 2등)에 부임했다.

1942년 8월 8일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국가 목표가 섰으니 거리낌없이 나갈 뿐' 이라는 글에서 "우리에게는 오랜 역사가 있는 것이고 또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신성한 기백이 선조로부터 우리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전장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정신이 우리들의 머릿속에도 있다. 단지 과거의 그릇된 사상에 지배돼 병사가 되어 전장에 나가는 것을 좋지 못하게 여긴 시대도 있었지만 우리들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금일같이 국가의 목적이 확립돼 우리들의 나갈 목표가 확실히 정해진 이 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전장에 나아가 나를 위해 싸우는 마음은 자연 우리들의 피를 끓게 하는 것"이라며 일제침략전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역설했다. 1946년 2월 20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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